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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의 관계론 중에서 본문
94년부터 글을 쓰고 공부하면서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필법이나 글씨체와 서예미학에 대한 생각이 생겼는데 우연히 신영복 교수의 글을 보다가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고 문장을 깔끔하게 정리를 한 글이 보이기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신영복 교수의 글에서 특히 멋진 문장이 있습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삐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한자 서예를 공부하다 보면 옛 서예가들이 정리한 글자 한자를 구성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결자 44법" 과 같은 결구법이 그것입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결구법에 따라 꾸준히 연습을 하여 글자가 바르게 써 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이후 글자의 조형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결구법이 아니라 그어진 한 획에 맞추어 나머지 획들이 균형과 호응을 이루도록 자리를 잡도록 글자를 쓰게 됩니다. 글자 한자 속에서 한 획에 따라 주위의 다른 획이 따르게 되고 종이 위에 한 글자에 따라 주변의 글자들이 양보를 하거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신영복 교수가 쓴 한 문장이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한 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붓을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문장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서도의 관계론"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서도(書道)의 관계론’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제가 글을 갓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 먼저 글을 배운 선배들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똑같은 글자가 연속으로 나오거나 옆에 붙게 되면 그 글자의 모양이 달라야 한다". 그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같은 글자가 붙으면 일부러 다르게 써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같은 글자를 두 번 쓰더라도 글자의 위치가 당연히 틀리고 몸의 자세가 달라지는데 붓을 대는 각도나 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첫 획이 미묘하게 다르게 그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옆의 획들이 양보를 하고 배려를 해서 처음 그어진 획과 어울리도록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 결과 두 개의 글자가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서예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한 쪽이 무겁게 되면 주위의 것들이 양보를 해서 답답해 지지 않도록 하고 한 쪽으로 길어 기울어지려 하면 반대 쪽에 무게를 두어 균형을 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불균형을 만들어 생동감을 부각할 수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안정적인 배치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두루 배려하는 마음이 중용의 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버님께
제가 서도를 운위하다니 당구(堂狗)의 폐풍월(吠風月)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편언(片言)이고 보면 조리(條理)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태세(太細), 지속(遲速), 농담(濃淡)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열 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질(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代償)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슬쓸한 것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 간(間)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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