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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들풀의 서예론

서도의 관계론 중에서

Dr. Jo 2016. 11. 30. 13:49

94년부터 글을 쓰고 공부하면서 부족하지만 나름대로의 필법이나 글씨체와 서예미학에 대한 생각이 생겼는데 우연히 신영복 교수의 글을 보다가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고 문장을 깔끔하게 정리를 한 글이 보이기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신영복 교수의 글에서 특히 멋진 문장이 있습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삐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한자 서예를 공부하다 보면 옛 서예가들이 정리한 글자 한자를 구성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결자 44법" 과 같은 결구법이 그것입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결구법에 따라 꾸준히 연습을 하여 글자가 바르게 써 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이후 글자의 조형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결구법이 아니라 그어진 한 획에 맞추어 나머지 획들이 균형과 호응을 이루도록 자리를 잡도록 글자를 쓰게 됩니다. 글자 한자 속에서 한 획에 따라 주위의 다른 획이 따르게 되고 종이 위에 한 글자에 따라 주변의 글자들이 양보를 하거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신영복 교수가 쓴 한 문장이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한 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붓을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문장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서도의 관계론"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서도(書道)의 관계론’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아버님께
제가 서도를 운위하다니 당구(堂狗)의 폐풍월(吠風月)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편언(片言)이고 보면 조리(條理)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태세(太細), 지속(遲速), 농담(濃淡)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열 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질(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代償)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슬쓸한 것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 간(間)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제가 글을 갓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 먼저 글을 배운 선배들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똑같은 글자가 연속으로 나오거나 옆에 붙게 되면 그 글자의 모양이 달라야 한다". 그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같은 글자가 붙으면 일부러 다르게 써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같은 글자를 두 번 쓰더라도 글자의 위치가 당연히 틀리고 몸의 자세가 달라지는데 붓을 대는 각도나 방향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첫 획이 미묘하게 다르게 그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옆의 획들이 양보를 하고 배려를 해서 처음 그어진 획과 어울리도록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 결과 두 개의 글자가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서예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한 쪽이 무겁게 되면 주위의 것들이 양보를 해서 답답해 지지 않도록 하고 한 쪽으로 길어 기울어지려 하면 반대 쪽에 무게를 두어 균형을 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불균형을 만들어 생동감을 부각할 수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안정적인 배치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두루 배려하는 마음이 중용의 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