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파사주
민아는 입구에 붙인 안내문이 또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걸 발견했다.
아까 분명 똑바로 붙였는데.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창틀에 내려놓고 투명테이프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는 가위 두 개와 커터칼, 쓰다 만 매직, 케이블 타이 묶음, 반쯤 뜯긴 과자 봉지가 뒤섞여 있었다. 테이프는 그 밑에 깔려 있었다.
“누가 이거 자꾸 건드려?”
대답은 없었다.
전시장 안쪽에서 선영이 말했다.
“바람.”
“실내에서 무슨 바람이야.”
“문 열어놨잖아.”
민아가 입구 쪽을 돌아봤다. 낡은 목제 문 두 짝 가운데 하나가 고정쇠에 걸린 채 열려 있었다. 밖의 더운 공기가 냉방이 덜 된 실내로 천천히 밀려들고 있었다. 골목 쪽에서는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한 번 크게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그럼 바람이 잘못했네.”
민아는 안내문 위쪽을 다시 눌러 붙였다.
“다음에 떨어지면 바람한테 시켜.”
바닥에 앉아 작품 아래쪽을 보고 있던 선영이 웃었다.
“응. 네가 말 잘하잖아. 네가 얘기해.”
“내가 왜 바람 담당이야?”
“사람 담당이니까.”
민아가 뭐라고 받아치려다가 그만뒀다. 맞는 말 같아서였다.
입구 옆 테이블에는 아직 방명록도 펴지지 않았고, 작은 종이컵들은 비닐째 쌓여 있었다. 개막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날에는 언제나 그랬다. 할 일은 거의 끝났는데 계속 생겼다.
그녀는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높은 공간은 밖보다 서늘했지만 오래된 건물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마른 나무 냄새와 종이, 먼지, 조금 전까지 바닥에 붙였다 떼어낸 테이프의 접착제 냄새가 희미하게 섞였다. 작품들은 이미 벽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포장지가 몇 군데 접혀 있었다.
은서는 벽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 자기 작품을 보고 있었다.
“너 아까부터 그거만 보고 있지?”
민아가 물었다.
“아니.”
“보고 있었어.”
“아니라니까.”
은서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옆에 거 보고 있었어.”
“네 거 옆에 있는 것도 네 거잖아.”
“그러니까.”
민아가 웃으며 지나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두 걸음쯤 더 갔다가 멈췄다.
왼쪽 벽이었다.
작품 하나가 어둡다기보다 벽 한 구간 전체가 죽어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천장 트랙의 조명이 각도를 달리하며 작품 위에 빛을 얹고 있었는데, 그곳만 색이 갑자기 빠진 것처럼 보였다.
민아가 고개를 들었다.
“수경아.”
대답이 없었다.
“정수경.”
멀리서 수경의 목소리가 왔다.
“왜.”
“여기 불 안 들어오는데?”
그제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위를 봤다.
수경이 가장 먼저 왔다. 지연은 들고 있던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고, 은서는 자기 작품 앞에서 두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선영은 바닥에 앉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수경이 벽 쪽 스위치를 한 번 봤다.
“이쪽만?”
“응.”
“아까는 켜졌는데.”
“아까 언제?”
“점심 먹기 전.”
선영이 말했다.
“그럼 전구가 나간 거 아냐?”
“세 개가 한꺼번에?”
지연이 위를 보며 말했다.
“같은 줄이네.”
민아가 손뼉을 한 번 쳤다.
“좋아. 발견은 했고. 이제 누가 해결해.”
수경이 민아를 봤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보통 해결하는 거 아니야?”
“나는 발견자야. 역할 끝.”
“편하네.”
“능력이지.”
수경은 이미 관리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관리실에서 온 남자는 작은 접이식 사다리를 펴고 올라가 트랙 조명 한두 개를 확인했다. 전원을 내렸다 올리는 동안 전시장 전체가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지만 문제의 구간은 그대로였다.
“등 문제가 아니라 이쪽 트랙 쪽 같아요.”
수경이 물었다.
“오늘 고칠 수 있어요?”
남자가 시계를 한번 보고 천장을 다시 봤다.
“지금 열어서 보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어디서 끊긴 건지 봐야 해서.”
“개막 전에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장담 못 해요.”
수경은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민아가 옆에서 말했다.
“알겠다고?”
수경은 전시장을 한 바퀴 봤다.
“옮기자.”
은서가 바로 물었다.
“뭘?”
“작품.”
“내 거?”
“네 것만 말고.”
수경이 어두워진 벽 쪽으로 걸어갔다.
“이 벽을 원래대로 살리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 빛을 빼.”
은서가 따라갔다.
“저건 빛이 있어야 돼.”
“알아. 그러니까 옮긴다고.”
“어디로?”
“잠깐만.”
수경은 벽과 맞은편 공간을 번갈아 봤다. 말이 없어지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움직였다. 지연은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오며 관객이 처음 보게 될 벽의 순서를 확인했고, 선영은 이미 다른 트랙 조명의 각도를 살피고 있었다.
“이쪽 하나 빼면?”
선영이 오른쪽 벽을 가리켰다.
수경이 봤다.
“뭐를?”
“끝에 있는 거.”
은서가 인상을 썼다.
“그러면 거기 너무 비잖아.”
지연이 그쪽을 봤다.
“꼭 채워야 하나?”
은서가 고개를 돌렸다.
“저만큼?”
“응.”
지연은 직접 그 앞으로 걸어갔다. 벽 중앙 가까이에 서서 입구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작품을 봤다.
“이게 옆으로 가면 여기서 한 번 끊기잖아. 나쁘지 않은데.”
“너야 비어 있는 걸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비었다고 다 부족한 건 아니잖아.”
선영이 말했다.
“난 찬성.”
은서가 선영을 봤다.
“넌 네 거 아니라고.”
“내 거 옮겨도 돼.”
“아, 진짜?”
“응.”
선영은 너무 쉽게 대답했다.
은서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민아는 그 사이 입구 쪽을 보고 있었다.
“잠깐. 이거 하려면 지금 해야 돼. 이십 분 있으면 사람 오기 시작할 거야.”
“삼십 분 남았어.”
수경이 말했다.
“아는 사람들은 일찍 온다니까.”
“그 사람들이 잘못이지.”
“그걸 입구에서 내가 말해?”
“네가 사람 담당이라며.”
“그 말 누가 했어.”
“바람.”
선영이 말했다.
이번에는 지연도 웃었다.
은서는 아직 벽을 보고 있었다. 자기 작품을 한참 보다가 반대쪽으로 직접 걸어가 섰다. 수경이 말한 자리가 아니라 조금 더 안쪽이었다.
“이쪽이면?”
수경이 다가갔다.
“조명이 닿아?”
선영이 천장 쪽에서 대답했다.
“돌리면 와.”
“관객 동선은?”
민아가 직접 걸어봤다. 입구 쪽에서 들어와 작품 앞에 멈추는 흉내를 내고 다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괜찮아. 대신 여기 테이블 빼야 돼.”
“그거 방명록 테이블 아니야?”
“입구에 작은 거 하나 더 있잖아.”
수경이 말했다.
“빼.”
결정이 나자 갑자기 말이 줄었다.
다섯 사람은 각자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작품을 내릴 때는 둘이 붙었다. 한 사람은 액자를 잡고 다른 사람은 벽의 고리를 확인했다. 선영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작품 아래쪽 간격을 봤고, 수경은 몇 걸음 뒤에서 전체 높이를 확인했다. 민아는 포장지를 치우다가 입구로 달려가 냉장고에 넣어둔 물을 꺼내왔고, 돌아오는 길에 테이블까지 옮겼다.
“이거 더 왼쪽.”
수경이 말했다.
선영이 작품을 든 채 물었다.
“얼마나?”
“조금.”
“조금이 얼마.”
“십 센티?”
“그럼 십 센티라고 처음부터 말해.”
“십이.”
“야.”
“열.”
지연이 벽 앞에 서서 웃었다.
“둘이 결혼하면 진짜 피곤하겠다.”
수경과 선영이 동시에 지연을 봤다.
“미쳤어?”
“싫어.”
두 목소리가 겹쳤다.
이번에는 민아가 웃다가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부부였다.
민아는 둘을 모르는 듯했지만 일단 웃으며 맞았다. 곧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고, 입구는 금세 좁아졌다. 누군가는 신발을 끌었고 누군가는 문 앞에서 들어올 사람과 나갈 사람이 서로 비켜주느라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다섯 사람의 발소리가 크게 들리던 공간에 목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지연은 벽 가까이에 붙어 서 있다가 자신이 통로를 막고 있다는 걸 깨닫고 옆으로 비켰다. 작업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자기들이 방금 옮긴 작품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실이 매번 조금 이상했다.
좀 전까지는 벽에서 내려 바닥에 세워두고, 뒤를 보고, 못의 위치를 바꾸고, 액자 아래쪽을 손바닥으로 받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앞에 서서 팔짱을 끼는 순간부터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것이 됐다.
한 여자가 지연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는 뭘 말하는 거예요?”
지연은 작품을 봤다.
“제가 만든 건 아닌데요.”
“아.”
여자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연이 웃었다.
“근데 제가 보는 건 말할 수 있어요.”
여자도 웃었다.
“그럼 그거라도.”
지연은 다시 작품을 봤다.
무엇을 말하는 작품인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오른쪽이 아주 조금 무거웠다. 아마 조명을 옮긴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게 때문에 반대쪽 빈 공간이 더 커 보였다.
지연은 그 얘기를 했다.
여자가 잠시 작품을 보더니 말했다.
“나는 반대로 봤는데.”
“어떻게요?”
“여기가 빠지는 것 같아요. 무거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연도 다시 봤다.
“그러네요.”
“내가 맞다는 건 아니고.”
“아니, 진짜 그렇게 보여요.”
여자가 웃었다.
“방금 전이랑 말이 달라졌잖아요.”
“보는 위치가 바뀌었으니까요.”
지연은 그 말이 특별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었다.
민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지연이는 원래 말 바꾸는 데 논리가 있어요.”
“야.”
“생각이 많아서 그래.”
“너 저쪽이나 봐.”
“왜?”
“누가 너 찾는데.”
민아가 뒤를 돌아봤다.
실제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봤지? 나 인기 많아.”
“가.”
민아는 벌써 그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아, 근데 저분한테 물어보지 마세요. 설명 길어요.”
지연이 등을 향해 말했다.
“서민아.”
“왜.”
민아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입 닥쳐.”
“네.”
그 대답에 근처 사람들이 웃었다.
은서는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받고 있었다.
“직접 한 거예요?”
“네.”
“이 재료를 왜 썼어요?”
앞의 두 사람은 그냥 예쁘다고 했다. 은서는 그 말도 싫지 않았다. 예쁘게 보인다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람은 작품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한동안 전체를 보고 있었다.
은서는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반대편 손으로 옮겼다.
“처음부터 이걸 쓰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럼요?”
“다른 걸로 시작했는데 너무 깔끔해져서요.”
“깔끔해져서 싫었어요?”
“네.”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와서 은서 자신도 웃었다.
“그게 좀 싫었어요.”
남자도 웃었다.
“왜요?”
은서는 작품을 한 번 봤다.
“다 이해되는 것 같아서.”
“이해되면 안 돼요?”
“저는 재미없어요.”
“본인이?”
“네. 제가 재미없으면 계속 못 하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을 꺼내거나 대단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참 뒤에 다시 작품을 봤고, 옆에 있는 다른 작업까지 천천히 보고 갔다.
은서는 그 사람이 입구 쪽으로 사라지는 걸 잠깐 지켜봤다.
민아가 옆으로 왔다.
“누구야?”
“몰라.”
“되게 오래 보던데.”
“그러게.”
“좋아?”
“뭐가.”
“오래 봐주니까.”
은서가 물잔을 마셨다.
“당연히 좋지.”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더 많이 보면 더 좋고.”
“욕심 봐.”
“왜.”
“아니. 좋아.”
민아는 웃으며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갔다.
은서는 작품 앞에 남았다. 누군가 다시 들어와 옆에 섰지만 조금 전 남자가 무엇을 생각했을지는 더 궁금하지 않았다. 다음에 다른 곳에 걸면 어떻게 보일지가 더 궁금했다.
그때 선영이 벽 아래쪽으로 몸을 숙였다.
“뭐 해?”
은서가 물었다.
“잠깐.”
“사람들 다니는데.”
“그러니까 잠깐.”
선영은 작은 종이 한쪽이 아주 조금 들떠 있는 걸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까 붙였던 부분이었다.
은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지금 해야 돼?”
“보이잖아.”
“나 안 보여.”
“나는 보여.”
“아무도 안 봐.”
선영이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됐어.”
“진짜 피곤하다.”
“너도 네 거 계속 보고 있잖아.”
은서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거랑 이거랑 같아?”
“비슷하지.”
“안 비슷해.”
“그럼 말고.”
선영은 이미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은서는 그 등을 보다가 웃었다.
마지막 관객은 폐장 시간을 십 분쯤 넘겨서야 나갔다.
그 사람이 밖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소리가 문 너머로 조금 들렸고, 민아가 문을 닫자 전시장은 갑자기 넓어졌다.
“끝.”
민아가 말했다.
수경은 바로 대답했다.
“안 끝났어.”
“왜.”
“치워야지.”
민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말 할 줄 알았어.”
다섯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개막 전에는 그렇게 급해 보이던 물건들이 이제는 이상할 정도로 하찮아 보였다. 빈 종이컵, 냅킨, 테이블 밑으로 굴러간 병뚜껑, 입구에서 떼어낸 포장 비닐. 민아와 지연이 잔을 모았고, 수경은 방명록과 테이블 위 인쇄물을 챙겼다. 선영은 낮에 사용한 공구와 사다리를 보관 장소로 가져갔다. 벽 가까이에 임시로 붙여둔 테이프도 떼어냈다.
은서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왜?”
지연이 물었다.
“이거 일반쓰레기 맞아?”
“뭐가?”
은서가 봉투 안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이거.”
민아가 봤다.
“종이잖아.”
“테이프 붙었잖아.”
수경이 멀리서 말했다.
“그거 하나 때문에 지구 안 망해.”
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빨리 버려.”
“아니, 분리해서 버리면 되잖아.”
선영이 지나가며 은서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테이프를 떼고 종이는 종이 쪽에, 테이프는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됐지?”
은서가 말했다.
“역시 선영이밖에 없다.”
수경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데려가.”
“뭘?”
“같이 살아.”
민아가 바닥을 닦다가 웃었다.
“오늘 왜 자꾸 결혼시켜?”
지연이 말했다.
“너희 둘도 괜찮아.”
“이지연.”
이번에는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이름을 불렀다.
지연은 빗자루를 들고 한 발 물러났다.
“알았어. 안 할게.”
민아가 말했다.
“너 오늘 기분 좋구나?”
“응.”
지연이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 말이 너무 간단해서 민아는 잠깐 지연을 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민아가 입구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아까 떨어졌던 안내문의 테이프를 떼었다.
“아까 누가 물어보던데.”
“뭘?”
선영이 물었다.
“다음 전시는 어디서 하냐고.”
수경이 방명록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다음이 있다고 누가 그래.”
“나도 그래서 모른다고 했지.”
“잘했네.”
“근데 말하고 나니까 좀 없어 보이더라.”
은서가 말했다.
“그럼 있다고 하지.”
“어디서?”
“어디든.”
“그게 제일 수상한 대답이야.”
민아가 말했다.
선영이 웃었다.
“서울이라고 해.”
“왜 서울이야?”
“아무 데나 하나 말하라며.”
“그럼 부산.”
“갑자기 부산은 왜.”
“바다 있잖아.”
지연이 끼어들었다.
“전시는 왜 자꾸 관광지로 가?”
“끝나고 놀아야지.”
민아가 말했다.
“그게 목적이었어?”
“중요하지.”
수경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랑 하면 전시보다 숙소 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려.”
“숙소 중요하지.”
“또 시작한다.”
말이 옆으로 새자 금방 다른 이야기가 붙었다. 부산이면 회를 먹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누가 회를 못 먹는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런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못 먹느냐는 시비가 붙었다.
은서는 쓰레기봉투를 묶다가 말했다.
“나는 더 큰 데서 한 번 해보고 싶긴 해.”
민아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큰 데?”
“몰라. 그냥 큰 데.”
“벽이?”
“사람이.”
“그럼 시장에서 해.”
“야.”
은서가 묶은 봉투를 민아 쪽으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
선영이 웃으며 말했다.
“난 벽이 큰 데도 좋아.”
“너는 벽보다 작업실부터 구해야 돼.”
수경이 말했다.
선영이 바로 받았다.
“맞아. 큰 작업실.”
“돈은?”
민아가 물었다.
선영이 잠깐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제일 중요한 걸.”
“지금 얘기하면 재미없잖아.”
은서가 웃었다.
“그건 맞아.”
지연은 바닥에 떨어진 테이프 조각을 주워 손가락 끝에 붙였다 떼며 말했다.
“아직 안 가본 데면 됐지 뭐.”
민아가 돌아봤다.
“어디?”
“어디든.”
“너까지 왜 그래.”
“네가 시작했잖아.”
수경이 말했다.
“하여튼 아무도 계획이 없네.”
민아가 바로 물었다.
“너는 있어?”
수경은 가방을 들었다.
“오늘 집에 가는 계획.”
“그건 나도 있어.”
“그것부터 성공해.”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났다.
밖에서는 늦은 버스가 큰길을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닫혀 있어서 소리는 낮고 길게 깔렸다. 냉방기는 조금 전보다 약한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시간을 봤다.
갑자기 모두가 움직였다.
“야, 진짜 가야 돼.”
“이거 다 했어?”
“쓰레기.”
“버렸어.”
“냉장고.”
“물만 남았어.”
“문 잠그기 전에 화장실 확인해.”
“내 가방 어디 있지?”
“아까 의자 밑.”
“누가 내 충전기 봤어?”
“서민아, 그거 네 거 아니고 내 거야.”
“아, 그러네.”
마지막에는 늘 이런 식이었다.
큰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방을 찾고, 쓰레기를 버리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민아가 입구의 안내문을 완전히 떼었다. 낮 동안 여러 번 떨어졌다 붙은 종이는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이거 버려?”
수경이 봤다.
“응.”
“진짜?”
“왜.”
“마지막인데.”
수경이 잠깐 종이를 봤다.
“그럼 네가 가져.”
민아는 종이를 다시 봤다.
“됐어.”
구겨서 버리지는 않았다. 반으로 접고 다시 한 번 접어서 폐지 쪽에 놓았다.
조명이 하나씩 꺼졌다.
개막 직전 문제가 생겼던 벽도 어두워졌고, 그 옆의 작품들도 색을 잃었다. 마지막 일반 조명이 꺼지자 출구 표지의 낮은 빛만 남았다.
다섯 사람은 문 밖으로 나왔다.
안쪽에 사다리는 없었다. 공구도 치웠고, 바닥을 가로지르던 임시 선도 정리되어 있었다. 벽에는 작품들만 남았다.
문이 닫혔다.
누군가 계단을 먼저 내려갔고,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다. 바로 웃음소리가 따라 내려갔다.
조금 뒤 그것도 들리지 않았다.
전시장 안에는 하루 동안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벽 아래에 떼어낸 작은 테이프 조각 하나가 붙어 있었고, 창틀에는 바닥이 조금 젖은 종이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냉방이 멈춘 뒤 오래된 건물의 낮은 소리가 돌아왔다.
작품들은 어두운 벽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