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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들풀의 서예론

낙필에 대하여

Dr. Jo 2017. 3. 17. 17:09

내가 서예를 할 때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 좋은 종이에 잘 갈아 놓은 먹을 먹인 붓이 종이에 닿는 순간이다. 잘 갈아서 입자가 고운 먹물이 보드라운 종이 위에 닿는 순간 먹물은 종이의 섬유질을 따라 스며 들어 간다. 내려 그은 획을 따라 몽글몽글 먹꽃이 피어난다. 그래서 처음 붓을 종이에 대는 그 순간은 아주 소중하고, 그 때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긴장된 상태가 된다. 가장 기분이 좋은 그 순간이 때때로 반대의 상황이 되기도 한다. 먹이 잘 못 갈리거나 종이에 수분이 스며 들어 있을 때에는 먹물이 종이에 스며들 때 고목나무 등껍질 처럼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서예에서 붓을 대는 것을 두고 낙필이라 말한다. 종이가 붓에 다흔 순간을 두고 낙필이라 하고 붓이 갈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착지라 한다. 옛 사람들은 낙필경(落筆輕) 착지중(着紙重)이라 표현했다. 붓을 대는 것은 가볍게 하고 움직여 나가기 위해 종이에 붙는 것은 무겁게 하라는 말인데 이것만 잘 되어도 좋으련만 의외로 이것을 체득하는데 오래 걸린다. 심지어 낙필경 착지중을 몸으로 실천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배울 때 그런 것들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많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고 배우는 사람은 글을 멋지게 잘 쓰고 싶어할 뿐이고 붓이 어떻게 되는지 유심히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종이에 붓을 대는 방법에 대해 기록을 남기려 한다.




흔히 처음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붓을 종이에 가져다 대면서 힘을 주어 붓을 누르게 된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 처럼 붓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떨어뜨리는 것이다. 떨어지는 것은 힘을 주지 않으면 바닥에 닿는다는 말이다. 붓을 충분히 떨어뜨리면 붓 털이 종이에 충분히 닿아지게 되는데 그런 이후에 그어진 선은 중앙으로 모이는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붓을 힘을 주어 누르면 아래 그림의 왼쪽과 같은 모양이 된다. 붓이 찌그러지면서 붓 털의 단면이 타원형이 된다. 그러면 붓이 자유롭게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워진다. 붓을 떨어뜨려서 종이에 붙이면 아래 그림의 오른쪽과 같은 모양이 된다. 오른쪽과 같이 붓을 떨어뜨려 종이에 붙이면 종이와 붓 털이 닿은 면적이 더 넓어진다. 이렇게 획을 긋게 되면 먹물을 더 많이 바르고 지나가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더 깊고 부드러운 먹색을 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붓의 단면이 둥근 형태로 되기 때문에 획의 가운데 부분이 가장 붓 털과 종이의 접촉이 많은 부분이다. 그래서 획의 테두리보다 중심이 더 짙고 깊은 색을 띠게 되고 그 결과 획이 가운데로 모이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 그림에서 오른쪽 붓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힘을 주는 방향 때문이다. 힘을 아래로 주게 되면 왼쪽 그림과 같은 형태로 붓이 일그러지고 힘을 옆으로 주면 오른쪽 그림과 같은 형태로 된다. 오른쪽 그림에서 화살표가 대각선 아래를 향하는데 실제 힘은 옆으로 주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붓, 특히 필관이 옆으로 움직일수록 붓 털이 종이에 닿는 길이가 점점 길어지고 그러면 붓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힘은 필관을 이동시키는데 쓰이고 수직방향으로 붓이 내려가는 것은 떨어지는 것이지 힘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낙필을 가볍게 한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낙필은 나비가 꽃잎에 내려 앉듯이 가볍게 하여야 한다. 아래 그림에서 왼쪽 첫번째, 두번째 그림은 낙필이라 할 수 있고 세번째 네번째 그림은 착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힘을 어떤 방향으로 쓰는지에 따라 붓이 일그러지기도 하고 가볍게 떨어지기도 한다. 획이 가볍게 보이게도 하고 블랙홀처럼 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처럼 보이게도 한다. 배접지 같은 두껍고 거친 종이에 이렇게 획을 그어보면 바로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혹 잘 모르겠다 싶으면 종이를 뒤집어 보면 된다. 붓을 눌러 납작하게 글을 쓰면 먹물이 얇은 종이 한장도 뚫고 들어가지 못 한다. 옛날에 왕희지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 있다. 입목삼분(入木三分) 왕의 명령으로 나무판에 글씨를 썼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깎아내고 다시 쓰려고 하니 나무판을 삼분의 일을 깎아낼 때까지 먹물이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그만큼 먹물이 가운데로 깊게 모여서 종이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붓 털을 똑바로 하여 나무판에 글을 써서 깎아내 보면 획은 점점 얇아지는데 납작하게 하여 쓰면 대패질 한번이면 글자가 다 없어져 버린다.


아무쪼록 낙필경 착지중의 도를 깨우쳐 입목삼분 하는 필력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