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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들풀의 서예론

정자는 흘림처럼, 흘림은 정자처럼

Dr. Jo 2017. 3. 9. 12:53

"정자는 흘림처럼, 흘림은 정자처럼 써라." 나에게 서예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어딘가 다른 책에 나오는 말인지 다른 사람이 먼저 했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붓으로 글자를 쓸 때에 머리 속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이다.


 

김씨 부인이 영조에게 올린 상언(金氏夫人 上言) / 81.5x160.0cm / 1727년

 

김씨 부인이 영조에게 올린 상언 중 일부

 

정자는 글자가 가지런 하다. 악기 연주에 비유를 하자면 음을 정확하게 짚어 나가는 연주자의 연주와 같은 느낌이다. 흔히 정자를 쓰면 글자 형태의 가지런함에 압도되어 획 하나 점 하나에도 삐뚤어짐이 없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러다 보니 획과 획 사이나 글자와 글자 사이가 자연스럽지 못 하고 막혀있는 느낌을 주게 된다. 정자를 쓸 때에는 가지런한 획에 신경을 쓰면서도 획과 획 사이, 글자와 글자 사이의 흐름이나 리듬을 신경써야 딱딱하고 막힌 글씨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김씨 부인이 쓴 글을 보면 획하나 삐뚠 것이 없고 줄 하나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획은 비록 정확한 자리에서 시작해서 단정하게 끝나지만 획이 끝나 붓끝이 빠져나가는 곳을 보면 당연히 다음 획으로 향하여 빠져 나가고 있다. 가지런하고 단정하면서도 흐름과 리듬을 놓치지 않은 글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봉림대군이 장모에게 / 42.3x30.0cm / 1641년

 

반대로 흘림은 글자가 자유롭고 앞 뒤 글자 사이에 흐름이 있다. 악기 연주에서 리듬이나 강약이 자유로워 감정 표현이 뛰어난 연주자의 느낌과 같지 않을까 생각된다. 흘림을 쓰게 되면 획의 연결이나 글자 형태의 자유로움에 치중해서 획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못하고 글자의 형태가 다른 글자로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모호해 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흘림을 쓸 때에는 붓의 흐름과 리듬이 충분히 돋보이도록 쓰면서도 획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하여 선의 질을 좋게 만들고 문자가 가진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위의 봉림대군이 쓴 글을 보면 팔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붓의 궤적이 어떻게 되는지 다 드러날 정도로 운필의 리듬과 흐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운필 속에서 획의 마무리를 대충대충 남긴 것이 없고 획이 시작하는 부분에서 반듯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유로움 속에서 반듯한 글씨는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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